[눈이야기]로 작가의 전작을 읽은 바 같은 맥락으로 읽어가면 조금은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나만의 선입견이고 편견이고 오만이고 도전이었다. 에로티슴 문학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던 눈이야기. 질펀한 장면들과 상상하기 조차 힘들었던 청춘들의 방황을 그린 작품이 눈 이야기였다면 같은 에로티슴이라 하더라도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조르주 바타유가 굉장한 작가였구나 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너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와 '인간'을 나타내는 영어단어가 합해져 만들어진 이름 트로프만. 주인공 이름이자 여자 셋을 사랑한 한 남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차지연의 의해 쓰여진 해제에 따르면 이 주인공은 '잉여인간'이나 또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데 저자의 말대로 슬집과 사창가를 드나들며 간간히 글을 쓰는 주인공은 작가의 젊은 시절을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즉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주인공에게 투영시켜 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허구적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그 때 당시 유럽의 정치적 상황이 고스런히 깔린 작품. 눈이야기보다 이 책이 나오기 더 힘들었던 것은 외설적인 묘사보다도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지도 모른다.
이 책에 부제를 붙인다면 '트로프만과 세여자'가 아닐까. 아내 에디트가 있으면서도 디르티, 라자르 그리고 크세니까지 세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트로프만. 첫번째 여자인 디르티. 독특한 이름의 그녀는 영어로는 DIRTY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가 그러한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도로테아라는 원래의 이름보다도 '디르티'라는 이름이 왠지 모르게 더욱 어울리는 그녀. 이름은 더러울지 몰라도 그녀를 통해서 트로프만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고귀함을 느끼게 된다.
디르티라는 여자가 그에게 반어적인 의미로 연관되어 있다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여자 '라자르'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투사의 모습을 보이는 그녀. 바로셀로나에서 투쟁을 준비하는 그녀를 대하는 트로프만의 태도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면서도 동조할 수 없었던 작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눈이야기에서 나란 존재에 시몬과 마르셀이란 두 명의 여자가 삼각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마르셀'과 같은 존재가 이 책에서는 '크세니'라고 할 수 있다. 주된 캐릭터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전적으로 주인공만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그녀. 아내 에디트는 없고 장모와 함께 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아픈 그를 간호해 주는 크세니. 이 어찌 헌신적이지 않으랴.
눈이야기의 마르셀 또한 그랬다. 나는 시몬과 먼저 정을 통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란 면이 있었을까. 결국 순수한 마르셀까지 동참시켜서 관계를 하게 된다. 시몬이 주된 가지라면 마르셀은 그에 달린 곁가지다. 곁가지 또한 없다면 밍숭맹숭한 나무가 될 수 있으니 꼭 필요한 존재일터. 크세니도 그러한 존재이다.
도로테아가 오고 있는 가운데 크세니가 먼저 도착한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크세니는 트로프만의 환대를 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지게 된다. 결국 트로프만은 도로테아만을 위해 기다렸던 것이다. 이처럼 무시당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그만 바라보는 크세니의 모습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누구라도 말이다.
에로티슴 소설이라고 해서 외설적으로만 보여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작가는 에로티슴을 통해서 죽음을 설명하려 했고 그 둘을 연결하려 했다. 트로프만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닮은 주인공을 내세운 것은 보다 주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보다 깊은 의미의 고찰이 필요해지는 시점이다.
사건이 벌어지면 검사가 사건을 기소하고 가해자는 자신을 대변해줄 변호사를 대동하고 양쪽의 진술을 들어본 이후에 판사는 판결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의 판사가 다른 한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다. 나라에 따라서는 배심원제도를 선택해서 여러 명의 의견을 모아 판사가 선고만 하는 경우도 있다. 판사가 내리는 결론은 다 옳은걸까. 언제부터 우리는 판사라는 직업이 생긴걸까.
성문법이 생기기 전에는 남이 나의 것을 빼앗가면 그대로 갚아주어야 했고 피해를 입히면 그대로 행해줄 수 있었다. 법이 제정되면서 남이 나에게 해를 가해도 판사가 어느정도까지만 판결을 내려버리면 그 이상은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답답함을 느끼는 피해자들이나 그들의 가족을 대신하듯 '복수법'이라는 것이 생겼다. 가해자들이 한 그대로 갚아줄 수 있는 제도이다. 사건이 생기면 피해자들의 가족들은 기존의 법대로 판결을 할 것인지 아니면 복수법으로 자신이 직접 가해자에게 형벌을 가할 것인지 결정을 하게된다.
다섯편의 이야기속에서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도리타니 아야노는 그 집행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복수감찰관'이다. 복수법을 행하려는 사람들에게 절차를 설명해주고 그들을 범인에게 인도해주고 모든 복수가 끝날 때까지 도와주는 것이다.
직접 복수를 행하는 피해자들의 가족은 그렇다해도 아무런 감정없이 복수감찰관이라는 일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라는 동물 자체가 원래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감정을 배제한 채 일을 하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절로 마음이 쏠리는 일들이 생긴다. 그는 과연 이 이을 계속할 수 있을까.
첫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서 흘렀다. 이러면 안되는데 라는 생각으로 다잡아 보지만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가 안타까워서 그런 생각이 들어버릴수록 더욱 빠르게 눈물이 맺히고 흐르기를 반복했다. 이 세상에 남에게 해꼬지를 하는 사람들은 너무 쉽게 생각한다.
인간은 개개인이 존중받아야 할 존재일 뿐 그 누구의 소속이 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다른 한 사람의 신체를 가지고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구 행한다.
자신이 행한대로 그대로 자신한테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복수법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이곤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최근 들어 읽은 몇 권의 책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는 중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미운 사람이 있고 싫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마구 해를 가하거나 죽이거나 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했다고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복수도 행해져서는 안된다. 어차피 복수를 해봐야 시원해지는 것은 그때 뿐 그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괴롭히는 것은 마찬가지일테니 말이다.
자기 자식을 죽인 아이를 복수법으로 징벌하려는 아버지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이에게 준 사랑이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에 대한 사랑을 뒤늦게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일까. 진정한 용서를 했다면 그의 마음은 평화를 찾았을까.
폭력배에게 잡혀가 고문을 받고 죽은 아이를 비롟롯해서 다섯가지의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그 모두는 복수법을 선택한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무차별 살인도 있고 질투심에 사람을 죽인 사건도 있다.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복수법을 행하겠다는 결정은 모두 동일하고 그 과정을 그려냈다.
데뷔작이 이렇게 심도있게 그려져도 되는 건가. 대단한 작가다. 분명 얇은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이 묵직하게 남아있다. 단지 재미로만 읽어버리고 말기에는 너무나도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 실제로 복수법이 생길리는 전혀 없겠지만 지금 이시간에도 범죄라는 것을 저지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신에게 똑같이 행해진다면 과연 자신은 이 일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진다. 당신들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