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코뿔소를 위한 변명],[코뿔소를 위하여]. 코뿔소 삼중주가 흘러나오지만 이 책에서는 절대 코뿔소라는 것을 찾을 수는 없다. 계속되는 코뿔소에 의한 이야기만 계속될 뿐. 그러므로 코뿔소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적으로 나오는 코뿔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것은 온전히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두식. 형사다. 리어카 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경찰에 쫓기다 못해 결국은 우리도 좀 살자면서 시위현장에 나가서 곤봉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직접 본 당사자이다. 그런 일을 당한만큼 평탄하게 쉽게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았다.
준혁. 검사다. 친가집, 외갓집을 떠돌면서 온갖 구박을 당하고 살아왔다. 아버지는 정치를 한다고 여기저기 다녔지만 결국은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어 실족사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경찰에 고발한 누명을 쓰고 자신의 누명을 벗기라도 하듯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이 역시도 만만한 인생은 아니다.
수연. 범죄심리학자이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 선배였던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경찰에 쫓기던 그를 영영 만나지 못하는 운명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혼자 남겨진 그의 어머니를 매해 찾아가 뵈었다. 원치않는 솔로가 되어 버렸다.
저마다 단 한 사람도 평범하게 살아오지 않은 인생들이다. 그 인생들은 저마다 서로의 삶에서 얽혀있지는 않지만 이토록 힘들게 살아온 인생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서로를 이해하기에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서로의 관심사가 다르고 서로의 생각이 다른지라 좀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나의 실종사건 앞에서 두식과 수연은 마주한다. 솔직히 말해 두식은 그녀의 침입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라진 사람이 중요하다. 전직 검사이며 지금은 변호사로써 활동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전관예우에 따른 것일테지만 여기서부터 그리 썩 마음에 드는 설정은 아니다. 그런 그가 사라졌다.
경찰쪽에서는 당연히 발칵 뒤집혀서 그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사무실에서는 그가 며칠전부터 불안한 증세를 보엿다고 한다. 며칠전 받았다는 택배. 그것은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한권이 논문같은데 이것을 단서로 잡아서 그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것이 납치사건이라면 돈을 요구하는 협박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이 건은 조금은 이상하다. 협박은 커녕 자신을 잡아보기라도 하라는 듯 계속되는 정보를 흘린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보내진 것은 동영상. 과연 이들은 전직 검사 출신의 변호사의 행방을 쫓아서 그를 구해낼 수 있을까.
단 한 건의 사건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두건 이상의 사건이 엮이면 분명 그 사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는 법이다. 두식과 후배들이 계속되는 헛발질을 하는 사이 검사 또한 투입이 된다. 이 일을 배후에는 누가 있는 것이며 그들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은 나를 추억속으로 데려다 놓았다. 신촌거리를 지날때면 늘 매캐하게 깔려있 던 최루탄 냄새. 힘들게 대학 들어가서 비싼 등록금 내고 저들은 왜 공부를 하지 않고 이런 데모를 벌이는가 어린마음에 궁금했었다. 그때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고 대학을 들어가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는 이미 '시위'라는 문화는 거의 소멸되었으므로.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시국이 이러했기 때문에 저들이, 조금이라도 더 배웠다는 저들이 행동으로 보여줄 수 밖에 없었음을. 그럼으로 인해서 애매한 사람들이 곤경을 겪기도 했지만 그럴수밖에 없었던 역사였음을 조금은 인식하게 된다. [외규장각 도서의 비밀] 한국 추리소설계에 돌풍을 몰고 온 작가라고 했다. 그 책을 읽어봐야할 것 같다. 이 작가. 심히 궁금해지려고 하는 바이다.
눈물이 차 올라서 동그랗게 맺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가 톡 떨어지기도 하고.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럴때가 있다. 내마음과 같은 글을 만났을때, 내 맘을 읽어주는 것 같은 글을 만났을때, 나도 그런데 하고 공감을 느낄때,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몽글몽글한 느낌이 든다. 영어로 감동이라는 단어는 moved나 tched라는 표현을 쓰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누가 내 마음을 만지는 것 같거든.
세권의 자그마한 표켓 사이즈의 책이 내마음을 들었다 놨다 자기마음대로 가지고 논다. '너 지금 이렇지' 하면서 달래주는 것 같다가도 '나도 이랬어' 하면서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고 '사랑을 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하면서 자기 자랑을 하는 것 같이 들리다가도 '사랑을 잃어서 나 지금 아파' 라고 투정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 책들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이쁜 표지의 새벽 세시를 먼저 집어들었다가 놓고 [무너지지만 말아]를 집어 들었다. 앞서 얘기했던 눈물방울들은 주로 이 책에서 많이 맺혔다. '응. 그래. 나 무너지지 않을께. 아직은 살아있으니 최선을 다해서 살아볼께'라는 혼잣말이 반복해서 나오게 된다.
피한다고 우울이 저리 갈 수 있을 것 같으면 사람들은 우울증이라는 병명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피해지지 않는다면 겪고 이겨내면 된다. 계절이 어떻든, 날씨가 어떻든, 기분이 어떠든간에 말이다.
글을 읽으면서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나에게 말해주듯이, 잔잔하게 누군가 내 옆에서 달래주듯이, 그렇게 한자한자 꼭꼭 씹어가며 읽었다. 그래서 가슴이 뭉클해지도록 느꼈다. 알았다. 네 말대로 그렇게 살아볼께. 배경으로 성시경의 너에게라는 노래가 깔려있지 않았어도 나는 머리속으로 그 노래와 이 글을 연결해서 듣고 읽었다.
짧은 이야기들이서 금방 읽어버릴수도 있지만 한번 노래가 연상되면 그 노래가 끝까지 머리속에서 플레이 되는 동안 내내 이 글만 반복해서 보고 있게 된다. 짧은 글이 주는 여운은 그 글의 몇천배보다도 더욱 길고 깊다.
가장 예뻤던 표지의 새벽 세시를 가장 마지막에 읽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하다. 지금의 내 상태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벽 세시라는 제목에 걸맞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느낌, 누군가와 이별한 느낌, 그 누군가와의 이별을 예감하는 느낌들이 온통 뒤섞여 있어서 메마른 감정을 적셔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리만족으로는 되지 않는 것일까. 아직도 메마르고 버석함은 여전하다. 아마 몇번을 되풀이해서 읽는다면 촉촉해질까? 아니다. 사랑은 그런것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느껴야 하는 것이지 간접경험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그마한 사이즈의 세권의 책이 합해서 주는 시너지는 아주 크다. 누군가 자신만의 위로가 필요할때, 자신의 사랑이야기가 필요할때, 또는 세상에 대해서 한번쯤은 반항하고 싶을때, 골라읽는 재미와 감동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세권이 당신에게 위안과 평안과 안식과 감동과 행복을 줄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