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주말엔 숲으로]라는 책을 보았을 때가 기억난다. 처음 읽었을때는 속좁게도 질투를 느꼈었다. 다들 자신의 전문적인 일을 가지고 있는 세친구들. 저마다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조금은 프리하게 일을 하며 숲에 사는 하야카와를 찾아온다. 인생의 힘듦과 일의 힘듦, 그리고 사람관계의 힘듦을 토로하면 그때마다 하야카와는 숲으로 같이 가서 그에 맞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 느낌이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거나 타이르는 식이 아니라 친구 간에 서로 할 수 있는 말 같아서 더욱 정답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사실 그 책의 끝은 여행사에 다니는 세스코가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는 내용이었다. 보통은 이어지기 마련인 이야기가 그렇게 끝이 나버려서 잘 읽던 책을 누가 뺏은 거 마냥 어? 하면서 약간은 당황했었다. 그 이후로 작품 속에서는 7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너의 곁에서]라는 책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등장을 했다. 이 친구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생소함이라 신기함은 없지만 대신 익숙함과 안도감을 준다. 그들의 생활은 어떻게 변했을까.
7년이라고 하면 굉장히 긴 시간으로 느껴지지만 실제로 살아가다 보면 무언가 하지 않고 그냥 부지런히 일만 했는데도 그럻게 시간이 가는 걸 알 수 있다. 아이가 있다면 아이의 성장에 따라서 시간이 이리도 흘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지만(7년이면 갓난쟁이가 자라서 학교에 갈 나이가 된다) 다 커버린, 일만 하는 어른들의 일상이란 별 변화없이도 시간이 훌쩍 흐른다.
경리일을 하던 마유미와 여행사에서 일을 하던 세스코.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일에 열심이다. 직함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여전한 그 모습이 반갑다. 물론 신상에도 변화가 있다. 마유미는 초고속 이혼을 경험했으며 이제는 새로운 사랑을 찾고 있다. 세스코의 모습은 그닥 부각되지 않는다. [주말엔 숲으로]에서 마지막에 만났던 남자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의 일도 그려주지 않지만 클로버를 통해서 다른 남자에게 말을 거는 장면으로 보아 그와는 잘 되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다음번을 또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이번편에도 무언가 딱 끝마치지 않고 여유를 남겨주고 있다. 숲에서 만난 타로의 선생님과 타로의 엄마인 하야카와. 그들은 몇번 만난적이 있고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책이 또 나오지 않을까.
하야카와는 치과의사와 결혼을 해서 타로를 낳고 여전히 숲에서 살고있다. 여전히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며 번역일도 여전히 하고 있지만 숲근처에서 살아가는 타로는 다른 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엄마가 아이를 그렇게 키운 것이다. 숲을 가로질러서 학교를 가며 친구들의 어려움에도 엄마가 숲에서 해준 말들을 인용해서 잘 해결 해나간다. 이 아이는 어떤 어른이 될까. 아마도 영화 [편지]에서 나왔던 박신양의 모습이 아닐까. 나무를 좋아하고 숲을 사랑하며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연구원.
여름이 지나가버려서 숲의 푸르름과 생동감은 느낄 수 없겠지만 가을이 오면서 이제 방방곡곡에 물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은 단풍놀이를 떠날 것이다. 숲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살 수 있을까.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어주는 숲이 되길 바라본다. 제목처럼 너의 곁에서.
이 이야기가 남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학생들이 보는 영어독해책, 역사분야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러시아에 살고있었던 고려사람. 그들은 사회적 상황이 안정되지 못한 한국땅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밀려나가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누구나 사연 한가지씩은 없겠냐만 내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더욱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강제이주 명령이 떨어졌다. 원인은 하나였다. 러시아,- 아니 그때는 소련이었다.-에서 그들을 일본의 스파이로 생각하고 그들이 살았던 땅에서 그야말로 몸만 내쫓았던 것이다. 그것도 추운 계절에. 한창 곡식을 추수해야 될 시기에 그저 몸뚱아리 하나로 열차에 실린 그들. 어디로 가는지 왜 가야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떠나야만 했던 그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된 때도 아니었으니 더욱 멀게만 여겨졌을 여정. 목적지를 모르고 떠나는 여행 아닌 강제이주는 그들에게 더욱 혹독했을 것이다.
먹을 것도 충분히 공급되지 않고 짐슴들이 타는 화물칸에 앉을 곳조차 없는 열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죽음에 이르는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하나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보다 이전 독일땅에 살았던 유대인들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다. 그들은 이것보다 더 심했다. 이들은 이동을 했지만 그들은 죽음으로 보내졌다. 한꺼번에 공동장소에 몰아넣고 가스를 내뿜어 단체로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그들. 그런 역사적 사실때문에 독일은 여전히, 지금도, 오랜시간이 자났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사죄의 말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았던가. 그저 죽이지 않아주었으니 감사하다고 절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 추위에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고려사람들은 변변한 옷가지도 없이 아무 죄목도 없이 가족이, 친척들이 모두 죽음의 땅으로 몰려가야만 했다. 먹지 못해 면역이 약한 아이들과 노인들이 먼저 죽음을 맞이했고 겨우 도착한 그 땅에서조차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그야말로 凍土의 땅에서 고려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밭을 일구고 경작을 해야했다. 이 열차에서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있는 것처럼 그들의 후손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들을 러시아말로 카레이스키라고 하던가. 고려인 몇세 이런식으로 불려지던 그들. 해마다 무슨 날이면 다큐멘터리에서 형식적으로 다뤄지곤 했었는데 그나마도 지금은 그들의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지 못한지 오래되었다. 내년은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이 내려진 지 7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그들 또한 한국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그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하고 보듬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 시점에 이런 동화책이 나와서 반갑다. 우리 선조의 역사를 아이들도 알아야 한다. 역사가 과거라고,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역사라고 해서 숨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 더욱 떳떳하고 당당함을 주장해야만 한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이야기. 이 책을 통해서 더 많은 아이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